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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권영해 “교도소·무기고 습격 광주시민들이 했겠나”

by sosohanwork 2024.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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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서 5·18 北개입 확인’ 본지 보도 거듭 인정
“北교과서 훑어보니 ‘5·18 우리가 했다’ 서술 많아”
“파악하라” 지시→“개입 확인” 대공수사국이 보고


 
▲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3일 조우석 스카이데일리 칼럼니스트와 특별대담에서 “안기부장 시절 북한의 5·18 개입 사실을 확인했다”는 본지의 6월21일자 단독 보도는 사실이라고 재확인했다. ©스카이데일리

 

안기부장(국가안전기획부장) 권영해

김영삼정부 시절 정보기관 수장이던 권영해(87·權寧海)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은 1980년 광주 5·18 때 북한의 개입이 확실하다는 견해를 재확인하면서 광주사태 당시 20사단 지휘부 차량을 공격하고 무기고 40여 곳을 한꺼번에 턴 데다 좌익사범이 있는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사람들은 결코 순수한 광주시민일 수 없다”고 일갈했다.

 

권영해, 5.18 北 개입 안기부서  사실확인

김영삼정부 시절 정보기관 수장이던 권영해(87·權寧海)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은
1980년 광주 5·18 때 북한의 개입이 확실하다는 견해를 재확인하면서 

광주사태 당시 20사단 지휘부 차량을 공격하고 무기고 40여 곳을 한꺼번에 턴 데다 
좌익사범이 있는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사람들은 결코 순수한 광주시민일 수 없다
고 일갈했다.

권 전 안기부장은 3일 오후 서울 강남의 모처에서 조우석 스카이데일리 칼럼니스트 겸 평론가와 2시간에 걸친 단독 대담에서 본지가 6월21일자로 단독 보도했던 ‘권영해, 5·18 北 개입 안기부서 확인’ 기사가 대부분 사실임을 재확인했다. 

 
 

권영해, "헌법전문에 넣자"은 정치권의 놀음에 불과하다

단, 자신의 그런 견해 표명이 양심선언의 일환이라는 세간의 관측은 일축했다.
권 전 부장은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 초기에 걸쳐 안기부장으로 재임했다.

이 기간은 5·18이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사회적 평가가 바뀔 무렵이었고, 따라서 김영삼정부가 관련 증거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그가 최종 실무자로 가담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날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안기부 재직 시절 정보기관 수장으로 북한의 5·18 개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비밀공작을 진행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비밀공작을 지시한 배경과 관련해
“안기부장 취임 이후 내 관심은 남북한 통일 이후 남북 사이의 진정한 사회통합의 문제였다.
그래서 기초연구를 위해 북한 교과서 수집을 지시했다.
그걸 훑어보니 수도 없이 ‘5·18은 우리가 했다’는 서술이 수두룩했다.놀랐다.
물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교육 차원의 언급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 이상이었다.
그 전부터 나는 북한 개입의 개연성은 있다고 봤지만, 뭔가가 숨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권 전 부장은 대공수사국 보고문건을 통해 당시 자신이 파악한 내용을 별도의 보고서를 만들어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한 바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바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확인 작업은 일상 업무의 일환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동시에 권 전 부장은 “광주 5·18은 동시에 순수한 민주화운동의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폄훼돼선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그럼에도 “광주 5·18을 헌법 전문에 넣자는 정치권 논의에는 반대하며, 그건 정치권 놀음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권영해의 입장

결국 그는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5·18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폄훼돼선 안 된다는 이중의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
북한 개입으로 민주화운동의 순수성을 이미 잃어버렸다는 걸 쉽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권 전 부장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의 광주 5·18 개입 문제를 밝히자는 주변의 제안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책임 있는 정보기관 수장 출신인데, 재임 중 인지하고 파악했던 일을 가지고 기자회견을 열어 떠들어댈 수 있느냐?

세상에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권 전 부장의 광주 5·18 관련 특별대담에는 최명주 전 안기부 1차장이 배석했다.
최 전 차장도 북한의 
5·18 개입 사실을 인정했다.
권 전 부장은 
자신이 1994~1998년 안기부장 재직 시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설에 관심 가졌던 배경과 그 이후 인지했던 사항을 2시간에 걸쳐 두루 밝혔다.
 
그는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5·18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폄훼돼선 안된다는 논리를 굽히지 않았다. 북한 개입으로 민주화운동의 순수성을 이미 잃어버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5·18 개입을 증언한 정부 최고위 인사로서 그의 증언은 의미 있다. 동시에 그는 5·18 문제를 개헌 때 헌법전문에 집어넣자는 정치권 논의에는 부정적이라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헌법 전문에는 자유민주주의란 대의를 집어넣은 것으로 충분하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 [1] 1980년 5·18 당시 광산경찰서 역전파출소 앞에서 긴 머리에 군복과 경찰복장을 한 장정들이 총기와 철모·요대·군장 등으로 무장한 채로 버스에 오르고 있다. 5·18 당시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외지인들이 대거 출현했다는 증언들이 무등산 증심사에서 목격된 장정 100명을 비롯해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2] 1980년 5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대공요원들은 북한방송을 시청하다 ‘연고대생 600명’이라는 북한 진행자의 멘트가 자막과 함께 공개된 사실을 접한 것으로 본지 취재 결과 확인된 바 있다. ‘연고대생 600명’은 5·18의 일련의 사건 전개 과정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표현 중 하나였다. 계엄령으로 학생시위 주동자들이 군경을 피해 숨어든 상황에서 수백 명의 대학생이 외지, 그것도 서울에서 광주까지 원정을 갈 수 있었겠냐는 의구심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주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했다는 문헌이 남아 있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숫자를 북한의 지령을 수행한 이들이라고 주장하는 연구가들도 있다. [3] 총을 든 인물이 머리에 ‘김대중씨 석방’이라는 글귀가 씌여진 흰 띠를 두르고 있다. 호남 사람이 ‘김대중 선생님’이 아닌 ‘김대중씨’라고 부르는 것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이 인물의 신원에 관심이 집중된 바 있다.
 
5·18 헌법전문 게재 반대… 정치놀음돼선 곤란”
 
민주화운동 가치 폄훼 안 돼… 北 개입과 분리해 다뤄야 
北 대상 정보수집·크로스체크 통해 검증한 건 모두 사실
청진 5·18 전사자 비석은 스카이데일리 자체 취재한 것 

 

 

 

다음은 권영해 전 안기부장과 일문일답이다

 

-뒤늦게 광주 5·18과 관련한 증언을 하게 된 배경이 뭔가?

“6월17일 자유민주당이 주최하는 위헌정당 진보당·더불어민주당해산국민운동본부 출범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레스센터에 갔던 것이 시발이었다.
전부터 나는 아내와 딸까지 함께 자유민주당 당원이다.
현재는 등 떠밀려서 당 고문까지 맡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때 대회장에 참석했다가 스카이데일리 기자를 만났다.”
 

-그럼 어떤 얘길 나누신 건가?

“당시 기자가 내게 ‘광주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기에
소신대로 ‘그건 사실이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다시 묻기에 ‘당시 광주 5·18에 왔다가 전사한 북한 군인들의 묘비가 청진에 있다’고 밝혔다.
언제 그걸 확인했느냐는 질문에는 ‘안기부장 현직 시절’이라고 밝혔다.
세 마디가 그날 대화의 전부다. 정보기관 출신으로 너무도 상식적인 판단을 언급했을 뿐 특별한 건 없었다.”
 

-그럼 대화는 한 10분 정도 걸렸을까?

“무슨 10분인가? 한 3분 내외로 아주 짧았다.”
 

-그럼 그 뒤에 나온 6월21일자 스카이데일리 지면은 보셨나?

“주변에서 하도 시끄럽고, 이런저런 말이 나돌기에 살펴봤다.
내 입장에서 꽤 곤혹스러웠다. ‘그가 뒤늦게 양심선언을 했다’고 언급했던 대목 등이 걸렸다.
내가 무슨 양심 불량한 일을 했던 사람도 아니지 않는가?”
 

-세상에 나도는 이러저런 세평을 아시나?

“모두 터무니없다. 일부는 나와 당시 파견검사 홍준표(현 대구시장)를 의혹의 시선으로 보지만 모두 근거 없다.

1996년도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 제정이란 건 엄연히 입법부인 국회 소관이고 정치권에서 벌어진 일인데, 정보기관 수장 신분인 내가 어떻게 거기에 개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근거 없고, 그런 무책임하게 말해 온 게 누군지도 안다. 광주 5·18을 연구해 온 지만원이고, 출신이 좀 의심스러운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의 마이클 이(Michael Yi)라는 사람 아니냐?”

권 전 부장은 김영삼정부와 김대중정부 초기에 걸쳐 안기부장으로 재임했다.
이 기간은 5·18이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사회적 평가가 극명하게 뒤바뀔 무렵이었고, 따라서 김영삼정부가 증거를 조작하는 과정에 정보기관장으로서 그가 가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런 이유로 그는 광화문 애국운동에서 역할을 해 온 애국자이면서도 1996년 김영삼의 광주민주화운동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그가 참여했다는 의혹도 여전히 따라다닌다.

-차제에 광주 5·18에 관한 생각을 가감 없이 들려주시길 바란다.

“우선 나는 5·18민주화운동과 북한 개입설 두 개를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게 논점을 분명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밝히지만 나는 광주 5·18이 민주화운동임을 폄훼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북한 개입설은 별도로 꼼꼼하게 연구해 봐야 한다.”
 
▲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1980년 5월21일발 보도를 인용한 북한 노동신문 5월22일자는 광주시의 20만 폭동군중이 1만 명의 괴뢰군(한국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무기고들을 부수고 무기를 탈취해 괴뢰기관(한국 정부기관)을 점거했다고 신속하게 전하고 있다. 당시 국내에서는 언론보도 통제에 따라 광주 소식에 더 둔감했다. 노동신문 캡처
 

-아까 5·18에 북한이 개입설 등은 정보기관 출신으로 너무도 상식적 판단이라고 말하셨다.

“사실이다.
오래 군에서 생활했던 사람으로서의 직감도 있다.
어떻게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시민들이 광주 사태 당시 20사단 지휘부 차량을 공격하고,
군수품을 만드는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할 수 있는가?
그들은 순수한 광주시민이 아니었다.
또 무기고 40여 곳을 동시에 털었다는 것도 그렇고, 좌익사범이 있는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것 등을 보면 당시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군 지휘관 시절 5·18과 직접 연결된 적은 있으셨나?

“5·18 당시 나는 강원도 전방의 3군단 작전참모였으니 후방의 5·18 같은 건 전혀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1988년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으로 근무하며 국회의 5공 청문회 때 5·18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나는 국방부의 청문회 대응팀을 총괄했다.
내가 했던 일은 당시 5·18 문제의 최종적 권위를 가졌던 대법원 판결문과 우리 군의 작전일지를 대조해서 그것에 근거해서 책임 있는 정부 답변을 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아까 5·18 때 북한 개입 여부를 확인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인가? 스카이데일리에 따르면 비밀공작을 지시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 건 말할 수 없다.
방법은 물론 시기 같은 것도 역시 확인해 줄 수 없다.
다만 북한을 대상으로 한 정보 수집을 내가 지시해서 진행한 것은 사실이고,
그렇게 해서 확보한 첩보 사항을 검증해 보기 위해 별도로 크로스 체크를 해봤던 것은 모두 사실이다.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비’.

-스카이데일리는 함경북도 청진에 있었다는 5·18 전사자 가묘와 비석의 존재를 북파공작원(HID)을 보내 권 전 부장이 직접 확인한 것으로 돼 있다.

“그건 그 신문이 내 인터뷰와 별도로 확보한 제3의 채널을 통해 취재한 사실이다.
다시 밝히지만 나는 그렇게 구체적 발언을 그날 한 적 없다.
나는 다만 당시에 어떤 구조물의 존재를 확인했을 뿐이다”
(그가 말한 구조물이란 5·18 전사자 가묘와 비석에 대한 언급이다. 참고로 스카이데일리 기사에는 5·18에 남파된 북한 군부대 중 사망자는 534군부대 소속 158명, 108군부대 소속 112명, 806군부대 소속 74명 등이 344명이고, 별도의 인원을 합해 모두 490명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날 인터뷰에는 북한 국가보위부 명단도 언급하셨던데.

“아니다. 그 얘긴 한 바 없다. 상식적으로 국가보위부가 인민군 내부의 5·18 전사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혹시 인민무력부의 명단이라면 또 모를까.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北개입 보고서 김영삼 대통령에 보고 안 했다”

 
“정보기관 수장 출신이 이제 와서 회견 열어 밝힐 일 없어”
퇴임 이후 30년 가까이 왜 침묵했는지 석연치 않은 점도 
일각선 허위 사실 유포죄로 고소·고발 검토… 후폭풍 예고 
 
스카이데일리는 권 전 부장이 보위부 명단에 대해 언급했다고 보도하진 않았다. 앞서 지난해 11월 인터뷰에서 대북첩보수집팀이 자료의 최초 출처를 ‘안기부/정보사(국군정보사령부-HID)’로 언급했으나 추가 검증을 못해 보도를 유예한 가운데 권 전 부장이 최근 인터뷰에서 안기부가 청진 묘비를 확인하고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을 파악했다고 언급함에 따라 크로스체킹이 됐다고 판단해 권 전 부장 인터뷰에 포함해 보도했다. 권 전 부장은 첫 인터뷰에서 “청진 묘비가 사실이다”고 확인했을 뿐 ‘보위부’에 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5·18 때 북한 개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셨는데, 안기부장 재직 시에 그런 비밀공작을 지시한 배경은 뭔가?

“안기부장 취임 이후 내 관심은 남북한 통일 이후 남북 사이의 진정한 사회통합의 문제였다. 물리적 통일과 화학적 통합은 서로 다른 것이니까. 그래서 기초연구를 위해 북한 교과서 수집을 지시했다. 놀랍게도 그걸 훑어보니 수도 없이 ‘5·18은 우리가 했다’는 서술이 수두룩했다. 놀랐다. 물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교육 차원의 언급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 이상이었다. 그 전부터 나는 북한 개입의 개연성은 있다고 봤지만, 뭔가가 숨어 있다고 판단했다.”
 

-그게 상식이다.

“그렇다. 우린 강한 의구심을 거둘 수 없다. 일테면 김일성은 생존 시 이른바 비밀교시에서 남조선을 통일할 두 번의 기회로 6·25와 4·19를 활용하지 못한 채 허투루 넘긴 것을 천추의 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 못지않은 혼란기이던 5·18을 수수방관하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간첩을 내려보내거나 특수군을 가동했을 개연성은 매우 크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건 그런 북한 개입을 보고서를 만들어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건 굳이 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했던 일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일상적 업무 차원의 하나였을 뿐이지 그걸 별도의 보고용으로 생각한 바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권 전 부장 당신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오늘 했던 증언을 반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그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물어보자. 내가 명색이 책임 있는 정보기관 수장 출신인데, 그런 내가 재임 중 인지하고 파악했던 일을 가지고 기자회견을 열어 떠들어댈 수 있느냐? 세상에 그런 경우는 없다. 난 지금 그런 걸 생각지 않고 있다.”
 

-좋다. 당장 5·18 문제를 헌법 전문에 집어넣자는 문제로 매번 시끄럽다.

“지금 헌법 전문에는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가 들어가 있고, 4·19까지 다 들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 개인적으론 5·18 문제를 개헌 때 헌법 전문에 넣은 건 반대다. 그건 정치권의 놀음일 수 있다. 헌법 전문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선명하게 집어넣은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 1980년 5월21일 정오 무렵 전남 영암을 거쳐 해남에 도착한 복면 무장괴한들이 해남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있다. 이들이 북한군 또는 북한의 민간 특작대였는지, 아니면 김대중의 용역이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순수한 시민이었는지 44년째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권 전 부장의 증언은 6월21일자 스카이데일리의 충격적인 단독 보도가 실언이거나 일회성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 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거리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 이후 30년 가까이 침묵을 선택했던 것도 석연치 않다.
 
5·18 하나로 국군의 명예가 통째로 실추되고, 권 전 장관이 군대 시절 가까이 모시던 정호용 전 참모총장·최세창 전 국방부 장관 등 군 선배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한 바 없다. 그 점에서 육사총구국동지회와 사단법인 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의 1일 성명서는 이해 못할 게 아니다. 
 
국가정보원(안기부의 후신)에 권 전 부장의 발언과 관련된 정보공개를 요구하고, 정보공개가 거부되면 행정소송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힌 것이다. 5·18특별법에 의한 허위사실 유포죄로 고소·고발도 검토 중이다. 광주의 입장에서 그를 궁지에 몰겠다는 게 아니다. 논의의 활발한 전개를 위한 방법론으로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대담=조우석 평론가·정리=허겸 정치사회부장
 
 
권영해, 그는 누구인가 
 
非하나회 출신… 김영삼 숙군 작업 주도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는 물심양면 후원 
 
권영해(87·權寧海·사진전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은 경북 경주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를 15기로 졸업한 뒤 비(非)하나회 출신으로 1988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군문에서 무난한 경력 관리에 성공했던 그는 외려 예편 이후 공적인 삶을 시작했다. 국방부 기획관리실장·국방부 차관으로 있던 그를 눈여겨본 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김영삼정부가 출범한 1993년 2월 바로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김영삼정부 출범 전 당선자 신분의 김영삼에게 하나회에 대해서 보고하고, 국방부 장관으로서 대대적 숙군(肅軍)을 주도했다. 하나회 때문에 진급 불이익을 받는 등 하나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안기부장에 임명된 건 1994년 말이다. 이후 김대중정부 출범 초기까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3년 3개월을 근무했으니 장수한 편이다. 당시 재임 중의 일로 기소와 재판 그리고 복역을 반복하다가 2008년 특사 이후 많은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다. 특히 2016년 이후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를 후원하면서 광화문 애국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현재는 대한민국통일건국회 회장은 물론 자유민주당 고문으로도 활동 중이니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성격은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다. 그러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광주 5·18 증언으로 다시 한번 그가 주목받고 있다. 혹시 스카이데일리 대담과 별도의 정보를 그가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우석 평론가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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